80 ‘나만 살아남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는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아, 살았다.’ 많은 사람들이 병실을 찾아와 걱정해주는 말을 들으면서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살아남은 기쁨이라고 말하면 정말 다른 분에게 죄송하지만 힘이 솟구치는 기분만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82 저는 옴진리교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건 당국자들에게 맡겨버리기로 했습니다. 전 이미, 그들을 저주하는 차원을 넘어서 버렸습니다. 그런 것쯤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 보지 않아도 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입니까? 그것은 윤리의 문제입니다. 역에 있다보면 인간의 어두운 면, 음성적인 면이 잘 보이는 법이지요. 83 “살아있다는 것은 아직도 할 일이 남았다는 것이지요. 힘내세요.”하고 격려해주더군요. 저 역시 “ 그렇습니다. 저는 모든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열심히 살아봅시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서로에게 축복과 격려를 하면서 인사를 나눈다는 것은 정ㄴ말 행복한 일입니다. 그런 관계에서는 결코 미움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에 대하여 104 전차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붐빕니다. 지요다 선의 마치야에서 오테마치까지는 거의 지옥이에요. 손도 꼼짝할 수 없습니다. 한번 손을 올리면 그 자세로 끝까지 가야 하니까요. 전차를 탈 때도 등부터 억지로 들이밀어야 합니다. 가끔 치한을 만나기도 하지요. 정말 불쾌할 때도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마스크를 많이 쓰는 것은 표정이 드러나지 않기 위해서 이전에, ‘사린사건’의 기억이 영향을 미친게 아닐까? 그 시작이었던건 아닐까? 언제부터 마스크를 일상적으로 쓰게 되었나요? 지하철에서 마스크를 쓴 일본인이 많다고 느꼈었다. 118 그 때문에 피해자들도 진정한 의미에서 그 당시의 공포를 아직 언어화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적절하게 언어화할 수 없기 때문에 신체화 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자신의 느낌을 언어로 바꾸는, 즉 의식화하는 회로가 형성
그들은 각기 다른 지점으로부터 다른 조건을 지니고 떠나왔다. 이제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을 꾸려가야 하는 만큼 의식하든 안 하든 자기라는 존재가 다름의 형태로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같은 생활공간에서 그 다름은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그리고 그 개별적인 '다름'은 필연적으로 '섞임'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거기에는 비극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서투름과 욕망의 서사가 개입될 수밖에 없었다. 다름은 개인성의 독립이지만 섞임이 그 종합은 아니기 때문이다. (27_28) 우리 과는 40명이었지만 모두가 강의에 출석하는 건 아니었다. 빨리 적응한 애들은 자신들이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주 수업에 빠졌다. 그런 이유라면 나 역시 충분한 조건을 갖췄지만 나는 학교 수업에 빠짐없이 들어갔다. 일단 기숙사에서 나와야만 혼자의 생활이 시작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혼자라는 건 어떤 공간을 혼자 차지하는게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익명으로 존재하는 시간을 뜻하는 거였다. (84) 갑자기 큰 소리로 목청껏 뭔가를 외치고 싶었다. 이를테면 명멸, 여로, 폭풍, 쾌활처럼 내가 말하고 싶었으나 발음하기 어려운 단어들을. 그리고 입안에서 맴돌다 사라져버린 수많은 나의 말들. 환희, 명랑, 축복, 낙원, 영원. 하지만 그래봤자 이 옥상의 어둠과 이불의 장막 뒤에 숨어서 혼자 외치는 것뿐이었다. 누구의 귀에도 다가갈 수 없는 말들이었다. (110) 그녀에게는 그 시절 내가 겪어야 했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다름'과 '섞임'의 세계가 있었다. 그 시절 우리에게는 수많은 벽이 있었다. 그 벽에 드리워지는 빛과 그림자의 명암도 뚜렷했다. 하지만 각기 다른 바위에 부딪쳐 다른 지점에서 구부러지는 계곡물처럼 모두의 시간은 여울을 이루며 함께 흘러갔다.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때 우리 모두는 막연하나마 앞을 다가올 시대는 지금과 다를 거라고 믿었다. (193) 신도시까지 운행하는 지하철은 끊겨 있었다. 할 수 없